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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를 발견한 목사 과학자, 프리스틀리

기독일보

입력 Jul 18, 2019 10:46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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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값진 것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정말로 값진 것들은 대부분 값없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들이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숨 쉬는 공기도 아무런 값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귀한 것 중의 하나다. 만일 3분만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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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공기는 여러 가지 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생물의 호흡에 필요한 것은 산소다. 공기 중에 가장 많은 기체는 질소인데, 모든 공기 성분의 거의 80% 가까이 된다. 이들 질소 성분은 식물체의 단백질을 만드는 주요 성분이다. 우리들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는 질소 다음으로 공기 중에 많은 기체다.

공기의 5분의 1 가량이 산소다. 이것은 지구상에 있는 생물이 살기에 아주 적합한 양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알맞은 양의 공기를 생물이 사는 지구에 주신 것이다. 만일 공기 중의 산소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아 산불이 나면 화재를 진압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반대로 지금보다 공기 중 산소의 양이 적으면 물속에 녹아 있는 산소가 너무 부족해서 수중 생물들은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수중 생물이 없다면 모든 물들은 바로 썩어 버리고, 결국 땅에 사는 생물들도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하게 되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생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산소는 18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전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산소를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는 "영국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1733-1804)였다.

프리스틀리의 고민

영국 리즈의 밀렌교회에서 목회 하던 프리스틀리는 어느 날 깊은 생각에 잠겨 혼자 길을 걷고 있었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가난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난 프리스틀리는 몸이 약한 관계로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훌륭한 신앙 덕분으로 19세가 되던 해에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23세에는 목사가 되어 니덤마켓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8세가 되던 해에는 웰링턴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늘 가시와도 같은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단지 신앙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목사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에 항상 심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변명하던 모세도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사용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마침내 목사가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그였지만, 당시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프랭클린(1706-1790)을 만난 후부터는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프리스틀리 목사님! 목사님께서 이렇게 뛰어난 과학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과학에 관심이 많기는 하나 저는 지금 하나님의 종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도 지금은 미국 독립을 위해 영국에 와 있는 외교관이지만 과학자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많은 달란트를 주신 것 같습니다."

피뢰침을 발명한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문필가이면서 위대한 과학자였던 프랭클린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을 위해 아버지의 고향인 영국에 와 있었다. 프랭클린의 격려에 프리스틀리는 실험과 연구에 용기를 얻는다. 이때는 프랭클린이 영국에 온 지 3년째 되는 1767년이었다.

탄산음료의 시작

당시 프리스틀리가 목회하던 리즈에는 커다란 맥주 공장이 있었다. 맥주를 만들려면 보리와 효모(酵母)와 호프라는 것을 바트라고 하는 커다란 통나무에 넣어 만들었다. 호프는 맥주의 특별한 쓴 맛과 향기를 내는 데 필요한 것이고, 보리는 당분을 만들어 알코올이 되는 원료로 쓰이며, 효모는 바로 액체를 발효시켜 거품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말한다. 이 거품은 이산화탄소라는 기체인데 당시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이 기체는 냄새도 맛도 없었기 때문에 프리스틀리도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가만히 대었더니 불은 살며시 꺼져버렸다.

18세기 당시, 의사들은 이 이산화탄소가 함유된 광천수를 소화제로 사용하였다. 이산화탄소에 의한 풍부한 거품과 상쾌한 쏘는 맛이 소화 불량에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광천수는 독일의 피어몬트라는 곳에서 나오는 광천수였는데, 병에 담아 판매되었으며 영국에도 수입되어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프리스틀리는 이 광천수가 맥주의 발효 시와 마찬가지로 거품을 낸다는 것에 착안하여 간단한 실험을 고안하였다. 두 개의 물 컵을 준비해 하나에는 물을 가득 채우고, 다른 한쪽 컵은 빈 상태로 발효 중인 맥주 거품의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는 물이 든 컵을 들고 위쪽에서부터 서서히 거품을 지나 밑에 둔 컵으로 흘려 내렸다. 잠시 후 그는 거품이 풍부하고 상쾌한 맛을 내는 물을 얻었다. 그 맛은 피어몬트수와 비교해도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이 방법을 잘 개발하면 비싼 피어몬트수를 수입해 마시지 않아도 되겠구나'

교회를 옮기게 되면서, 이곳 맥주 공장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게 된 프리스틀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연구를 시작해, 마침내 석회석에 산을 가하면 이산화탄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방법을 사용하여 피어몬트수보다 50분의 1 이하의 가격으로 탄산수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탄산수는 매우 인기가 있어 상업적으로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괴혈병 등의 치료제로도 사용되었다. 괴혈병은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잇몸에 자주 피가 나고 빈혈이 생기는 병으로 탄산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도 당시의 사람들이 약효를 의심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탄산수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소다수라 불렸던 이 탄산수는 이후 향료 등을 첨가하고 맛을 더 향상시켜서, 바로 오늘날 사이다, 주스, 콜라 등 청량음료의 탄생을 가져왔다. 탄산수의 개발은 프리스틀리를 유명한 과학자로 인정받게 하였다(그는 이 탄산수의 발견으로 학술원으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이렇게 그는 탄산수 음료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 대한 열정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산소의 발견

"프리스틀리! 이 볼록렌즈가 자네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의 연구열에 감동한 한 친구가 어느 날 지름이 30센티미터나 되고 초점거리가 50센티미터나 되는 커다란 볼록렌즈를 선물하였다. 그런데 이 볼록렌즈를 통해 1774년 8월 1일, 마침내 그의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날도 그는 실험실에서 볼록렌즈를 통해 여러 가지 물질들을 태워 보다가 우연히 붉은 수은 화합물을 태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발생한 기체에 불을 붙이자 즉시 특이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바로 산소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이 새로 발견한 기체에 우연히 양초를 갖다 대었을 때 불꽃은 아주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이 새로운 기체에 양초를 가져다 대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기체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프리스틀리의 연구는 계속 이어졌다. 그의 새로운 연구는, 공기보다도 가벼운 이 기체 속에서 생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 실험은 생물학과 화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실험 중의 하나였다. 산소를 유리 병 속에 잘 넣은 다음 외부의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물속에 넣어 둔다. 그리고 적당한 나무 상자를 물 위에 띄우고, 생쥐를 잡아 철사 올가미를 이용해 물에 젖지 않도록 유리 병 안에 잘 집어넣었다. 만일 이 기체가 생물에 유독한 것이라면 생쥐는 몸부림을 치다가 죽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공기를 넣은 유리병 속의 생쥐는 15분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비해, 이 기체를 넣은 유리병 속의 생쥐는 30분이 지나도 조용히 있었다. 그가 생쥐를 꺼내자 생쥐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쥐의 몸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 생쥐를 따뜻한 난로 옆으로 데려가서 보호하니 이내 생쥐는 생기를 되찾았다.

여러 번의 실험을 거친 끝에 이 기체는 전혀 해를 미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 기체를 넣은 유리병에서는 공기를 담은 유리병에서보다도 대체로 3배 이상 생쥐가 잘 견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생쥐뿐 아니라 식물도 쥐들과 함께 넣어 실험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광합성과 호흡 작용에 대한 최초의 생물 화학적 실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리스틀리 목사는 이 기체를 직접 마셔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보통 공기와 별반 차이를 느끼지 않았으나 여러 번 마시자 한참동안 폐가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기체를 '완전 연소시키는 공기('플로지스톤 없는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고 부른 산소였다. 그런데 화학 원소로서의 '산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프리스틀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인 과학자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였다. 연장자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겸손이었을까? 라부아지에(1743-1794)는 자신이 찾아낸 여러 과학적 사실들과 실험은 모두 프리스틀리(1733-1804)의 공헌 덕분이라고 조용히 인정하곤 했다. 두 과학자를 굳이 비교하자면 프리스틀리가 탁월하고 창의적이며 성실한 실험 과학자였다면 라부아지에는 상대적으로 좀 더 냉철하고 기초가 탄탄한 과학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프리스틀리가 비과학적인 '플로지스톤'설(주: 모든 가연성 물질에는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입자가 있어 연소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 소모되고, 이것이 모두 소모되면 연소과정이 끝난다는 설)을 존중한 반면 라부아지에가 '플로지스톤'설을 가볍게 일축(1783년)해버렸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 미묘한 두 사람의 성향 차이에 대해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자신의 "패러다임" 이론을 설명하는 데 상세히 할애하고 있어 흥미롭다.

프리스틀리는 이 새로운 기체가 탄산수와 같은 기호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의학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최근에 일본 등에서는 산소를 담아서 오염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상품화하여 팔기도 한다고 하니, 프리스틀리의 200년 전 예측은 오늘날 조금은 엉뚱한(?) 형태로 기호품이 된 것이 아닐까?

이 밖에도 프리스틀리는 전기 전문가인 프랭클린과의 교류를 통해 전기에 관한 실험도 많이 하였고, 암모니아, 염화수소, 일산화탄소, 마취제로 쓰였던 이산화질소, 이산화황 등 20여 가지 기체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들 발견들은 화학의 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다. 이제 프리스틀리 목사는 위대한 과학자로 영국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프랑스 혁명과 프리스틀리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절대 왕조를 무너뜨리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1789년에 일어난 이 혁명은 온 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과 자유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였으며, 또 한편에서는 이런 일들에 저항하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혁명이 영국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폭도가 되어서는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죽이기까지 한다. 프리스틀리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버밍엄이라는 영국의 중남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영국인 폭도들은 프랑스 혁명을 핑계 삼아, 프리스틀리의 놀라운 과학적 발견들도 혁명이 일어나는 데 원인이 되었다고 다그쳤다. 그의 인쇄소와 집도 불살라버렸다. 바로 프리스틀리가 이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프리스틀리는 런던으로 옮겨갔으나 그곳 학술원 회원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만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프리스틀리를 옹호하였다. 다행히 죽음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프리스틀리는 비국교파 목사로서 영국에서의 생활에 실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개혁과 실험 정신을 오히려 불순한 의도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싫어진 것이다.

미국에서의 프리스틀리 그리고 평가

프리스틀리는 1794년, 프랭클린이 이야기해 주던 신앙과 자유의 나라 미국의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였다. 미국은 1776년 프랭클린 등이 중심이 되어 결국 독립을 쟁취한, 그가 원하던 청교도의 국가였다. 프랭클린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펜실베니아 대학의 화학 교수직을 제한했다. 미국 철학회도 그를 환영하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개인적인 집필 활동과 연구에 더 집중한다. 사실 그는 아주 다재다능한 학자였다. 『여러 가지 기체에 관한 실험과 관찰』은 여섯 권에 달하였고, 신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저술도 26권이나 되었다. 미국에서도 4권으로 된 『현재까지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o the Present Times』를 발표했다. 남북전쟁 지도자들인 J. 애덤스와 T. 제퍼슨의 친구로서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계시의 교리와 비교해본 이교도 철학의 교리 Doctrines of Heathen Philosophy compared with those of Revelation』는 그가 죽은 뒤 출판되었다. 이렇게 프리스틀리는 미국 땅에서도 묵묵히 연구와 신앙생활을 하다 1804년, 하늘나라로 갔다.

물론 오늘의 눈으로 보면 프리스틀리는 정통적 신앙을 지닌 교파의 목사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영국 유니테리언 교파의 유명한 목사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교회사에 나타난 유니테리언파들의 활동을 참조하기 바란다. 신학적 비평의 자리가 아닌 여기서는 단지 그가 보인 과학에 대한 정열로 그를 바라보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 유니테리언 교파는 1816년 유명한 하버드대 신학부를 창설하였고 그곳은 곧바로 유니테리언 신학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록 말년이 가까워 떠나 버린 조국 영국이었지만, 오늘날 영국 국민들은 여진히 그를 위대한 "영국 화학의 아버지"로 자랑하며 변함없이 존경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프리스틀리는 영국뿐 아니라, 전 인류 화학 역사의 큰 기초를 닦은 가장 뛰어난 화학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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