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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턴, 원자론을 최초 주장한 과학자

기독일보

입력 Jul 24, 2019 09:58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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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색맹이 있는 아이

 

'오늘은 저 양말을 꼭 어머니께 사다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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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거리의 진열장에서 유심히 보아 둔 양말을 한 켤레 샀다. 늘 뜨개질한 양말만을 신고 다니시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존, 참 멋진 양말이구나. 하지만 이 양말을 신고 교회에 가지는 못하겠구나."

존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교회에 신고 가실 수 있도록 푸른빛이 도는 점잖은 색으로 골랐어요."

"아니란다. 이것은 붉은색 양말이란다."

"아니 어찌된 일이지요? 제 눈에는 분명히 푸른빛이 도는 점잖은 색인데?"

오늘날에도 이처럼 어떤 특정한 색깔은 잘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색약이라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을 학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은 존이 처음이었다. 그가 바로 물질의 원자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존 돌턴이다. 오늘날 붉은색과 녹색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을 '돌터니즘'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돌턴의 신앙

존 돌턴(John Dalton:1766-1844)은 어느 추운 겨울 영국 컴벌랜드 주 이글스필드라는 마을의 한 작은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도 지으면서 옷감을 직접 손으로 짜서 파는 직물공이었다. 어머니 데보라는 "오직 하나님과 남편을 위해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기독교의 한 분파인 경건한 프랜드(friend)교파(퀘이커파)교도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돌턴도 퀘이커교의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돌턴은 어릴 적부터 매우 끈기가 있고 영리한 학생이었다. 이 학교의 로빈슨 교장 선생님은 곧잘 학생들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주었는데 모두들 포기한 문제를 돌턴은 끝까지 풀어내곤 했다.

"존, 우리 함께 학교를 운영해 보자."

졸업한 돌턴에게 형 조나단은 퀘이커 학교를 설립해서 함께 운영하기를 제안했다. 당시 영국은 국교를 정해 놓고, 같은 기독교라도 국교에 속한 기독교파의 사람들이 아니면 특정한 학교의 입학을 허락하지를 않았었다.

"그렇게 하지요. 하나님을 잘 믿는 훌륭한 일꾼들을 만들어 봅시다."

두 형제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농부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농사에 필요한 일기 예보도 알려주곤 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기 예보를 위해서 이때부터 돌턴은 57년 동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기상에 관한 돌턴의 기록은 20만 종이나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한 과학자였는가를 보여 준다.

어느 날 돌턴은 장로교 교단이 맨체스터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대학은 퀘이커 교도를 비롯한 비국교파의 여러 학생들에게도 입학을 허용한 진리와 자유와 신앙을 교훈으로 하는 대학이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학교에 혹시 강사의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별다른 배경도 없었지만 돌턴은 이 학교에 지원하여 강사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며 자연 과학과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주의 만물에 질서를 주셨습니다. 수와 무게 등으로 측정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지요."

그는 학생들이 먼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가 생각하던 대로 신앙의 자유와 진리만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라는 조직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예전 생활로 돌아가자.'

그는 사표를 내고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마침내 꾸준히 써 온 일기를 토대로 기상학에 관한 논문을 완성했다. 그리고 곧바로 색맹에 관한 연구 논문을 최초로 발표했다. 이제 누군가 그에게 연구할 여건만 마련해 준다면 그는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특별한 준비를 해놓으셨다. 어느 날 돌턴은 길을 걷다가 잘 아는 목사님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다.

"돌턴 선생, 요즘은 통 놀러 오시지도 않고 어쩐 일이세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제가 아주 존스 목사님 댁에 들어가 살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참으로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솔직한 성격의 돌턴을 잘 아는 이 할머니는 돌턴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실험과 연구를 하는 데도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돌턴이 연구할 여건을 마련해주신 것이다.

교회에 가는 일과 일기 쓰는 일을 제외하면 이른 아침부터 그의 모든 일과는 실험과 연구하는 일이었다. 열에 대한 각종 가스와 액체, 고체의 영향에 대해 실험하였으며, 당시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여러 원소들의 신기한 현상을 찾아내려고 조사했다.

연금술의 종말을 가져온 돌턴의 연구

이때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물질의 입자들은 원자량에 따라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다르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본래 화학 물질도 입자인 원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화학에도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까?'

돌턴의 이런 생각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는 마침내 화학의 역사에 중요한 발견을 했다. 물질의 원자론을 주장한 것이다.

"기체 상태에서 원소들은 항상 일정한 비율로만 합친다."

"각 원소의 원자량을 알면 이들이 결합할 때의 비율이나 무게를 알 수 있다."

이제 돌턴의 이론에 의해, 철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거나 심지어 죽지 않는 약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던 연금술사들의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화학 결합이나 분석이라는 것은 단순히 원자들을 서로 분리시키거나 합치는 과정에 불과하지요. 물질을 새로 창조하거나 아주 없애버리는 일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돌턴은 1808년에 발표한 『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라는 책에서는 원자설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물질은 원자라고 부르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알갱이로 되어있다. 모든 원자들은 새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깨뜨려질 수도 없다. 같은 종류의 원자들은 모두 성질이 같으며 무게도 같다. 이들 원자의 주위에는 지구를 구름이 덮고 있듯 많은 열 원소가 둘러싸고 있다."

돌턴이 어떻게 원자론을 착안 했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그의 노트 가운데 일부가 2차 대전 때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척자로서의 돌턴의 생각이 모두 옳았던 것도 아니었다. "최대 단순성의 원리"를 따라서 돌턴은 물을 HO(실제로는 H₂O)로 보았고 산소의 원자량은 8(일반적으로는 16이다)로 보았다. 하지만 당시에 돌턴 말고 누가 여기까지 연구의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없었다!

본래 원자론의 원조가 되는 고대 원자론(atomism)은 초기 자연철학자들을 거쳐 원자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우키포스와 유물론(materialism)의 아버지 데모크리토스(주전 460년-주전 370년)에 뿌리를 둔다. 이들 자연철학자들이 우리가 인식하는 달고 쓰고 뜨겁고 차고 보여 지는 다양한 색깔 등에 대해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실은 원자와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는 것은 대단한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창조 신앙이 없었기에 이후 유물론으로 흘러버린 점은 아쉽다할 수 있다. 이것을 비로소 현대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가져 온 것이 바로 돌턴이었다.

과학사학자 찰스 길리스피는 돌턴에 대해 그는 독학의 과학자요 정신은 독창적이며 강인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렇게 돌턴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 로버트 보일도 파악할 수 없었던 "입자"를 수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연 최초로 원자론을 주창한 위대한 물리화학자였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실험으로 증명한 맨체스터의 제임스 줄(1818-1889)도 돌턴의 제자였으니 돌턴을 실질적인 최초의 물리화학자라고 칭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영국 상류 사회에 합류하지 못한 소박한 과학자 돌턴

이제 그는 유명해졌다. 맨체스터의 문학 및 천문철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는가 하면, 영국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밀려들었다. 그중에는 런던에 있는 유명한 지식인 모임인 과학 지식 보급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런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종교를 믿는 런던의 상류층들과는 달리 시골의 경건한 퀘이커교도였던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런던의 귀족들은 어색하고 촌뜨기 같은 그의 행동에 대해 흉을 보곤 했다. 당시의 귀족들은 사교의 수단으로 으레 담배를 피우곤 하였는데 돌턴은 이런 형식이 싫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건 학자로서 그의 큰 약점이야."

런던의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돌턴을 비하하곤 했다. 정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데다 퀘이커교를 믿는 그를 사람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돌턴의 위대성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턴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들은 결국 그를 영국학사원과 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되게 하였다.

당시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였던 험프리 데이비 경은 그에게 국왕의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형식을 싫어하고 훈장을 좋아하지 않는 퀘이커 교도였던 그는 왕이 주는 훈장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수상식장을 매우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돌턴의 노년

이렇게 돌턴은 영국 런던의 귀족 사회와 깊게 교류하지 않으며 조용히 노년을 맞는다. 한번은 프랑스의 벨티에라는 유명한 학자가 원자설을 창시한 이 대과학자를 만나보려고 맨체스터를 방문했다. 벨티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달톤 선생 같은 대과학자는 분명 커다란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앞에 두고 열강 중일거야.'

그러나 막상 이 도시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그를 모르는 것 같았다. 간신히 물어물어 그는 작은 골목을 지나 작고 허름한 집의 뒷방으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그는 돌판 위에 쓴 계산 문제를 풀고 있는 어린아이를 돌보고 있던 한 초라한 노인을 발견했다. 그가 바로 돌턴이었다.

"돌턴 선생님, 말씀 좀 여쭐 수 있을까요?"

벨티에가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 아이가 계산한 것을 좀 고쳐주고요."

돌턴은 그렇게 대답했다.

한번은 그의 가난한 생활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험프리 데이비경이 영국 해군이 지원하는 극기 탐험에 그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이 일은 상당한 수입도 올릴 수 있고 명성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실천하는 퀘이커교도였으므로 정중히 사양하는 편지를 험프리 데이비에게 보냈다. 그는 다른 일에는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고 일평생 신앙과 학문에 온 힘을 기울인 참다운 과학자요 신앙인이었다.

1844년, 일흔 일곱 살이 된 이 노 과학자는 죽는 날까지 실험실을 지키며 연구를 계속했다.

"오늘, 비가 조금 내리다. 밤."

매일 밤 9시 15분이면 정확하게 기록하던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돌턴이 죽자 그의 눈은 유언대로 친구인 의사 랜섬에게 보내졌다. 색맹이었던 그는 자기가 죽으면 연구 자료로 써달라고 그의 안구를 기증했던 것이다. 그가 퀘이커교를 믿었다고 그의 믿음에 시비를 거는 사람도 물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자 돌턴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한 일들을 평생 동안 묵묵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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