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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율법의 채무자인가, 사랑에 빚진 자인가?

기독일보

입력 Jul 26, 2019 03:09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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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성경은 두 가지 '채무 의식(意識)'을 말한다. '율법적 채무 의식'과 '사랑의 채무 의식'이다. 전자는 인간의 의(義)로 구원을 이루려는 자에게서 나온 의식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사랑의 강권을 받아 나온 의식이다.

구태여 둘을 구분지어 적용시켜 본다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적 채무'의식을 가진 자이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채무의식'을 가진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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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도록 충동하는 '사랑의 채무의식'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갈 2:20)에 감읍해서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고 하신 말씀은 근본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스스로를 '율법' 아래 두므로 자신을 '율법의 채무자(債務者)'로 만들지 말고, '은혜' 아래 두어 '사랑의 채무자(債務者)'가 되게 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헌신으로 내어 모는 것도 이 '사랑의 채무의식'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는 은혜의 감읍함이 깔려 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사랑의 강권'이라고 표현했다(고후 5:14-15). 이 사랑의 강권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 치열하게 살도록 했다(고후 5:15, 빌 1:20).

그는 자유자였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 되길 자처했고(고전 7:22), 마땅히 누릴 자기 권리(權利)를 쓰지 않게 했고(고전 9:1),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했고(고전 15:10).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도록 했다(골 1:24).

◈율법의 채무는 심판으로, 사랑의 채무는 상급으로

'율법의 채무'는 그것을 변제하지 못하는 자를 심판에 빠뜨린다. 이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롬 3:19, 갈 3:10). 그리고 그 '율법의 채무 의식'은 사람을 옭아매고, 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에 빠뜨린다.

그러나 '사랑의 채무 의식'은 그것을 지불하지 못한다고 사람을 정죄에 빠뜨리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눅 1:75).

그러나 이 '사랑의 채무'는 인간 처세술로서의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같이 베품 받은 것에 대한 되갚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바라고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이 '기브 앤 테이크'로 왜곡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이 된다. 이는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 개념'에 위배될뿐더러, 사랑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율법의 올가미를 씌우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것(고전 13:7)'을 요구하는 끝간 데 없는 사랑의 의무감은 그 어떤 율법 조항보다 사람을 옥죌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지 못할 때 오는 죄의식과 절망은 사람들을 나락으로 내몰게 된다.

'사랑의 강권'은 은혜의 감읍함에서 우러나오는, 말 그대로 '사랑 의식(意識)'이다. 심지어 명시적인 '계명(誡命)'으로 받은 것조차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의 강권'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마지 못해 지워지는 강요란 없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말미암는다.

비유컨대,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어린 자식에게 맛있는 것을 잔뜩 주고선 '아빠 한 입만 주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맛있는 것 아빠가 다 사주었으니 너도 아빠에게 한 입 줘야지'라는 권리 주장의 의미도 아니다. 아빠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아이의 사랑스런 손길이다.

'율법적 채무'가 희랍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형벌로서의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요구라면, '사랑의 채무'은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의 독(The jar of law)'이 채워졌다는 확증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 '사랑의 채무 의식'은 율법 완수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자축 의식(自祝 意識)이다. 거기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없다. 그들의 관심의 대상은 더 이상 '심판'에 관한 것이 아닌, '상급'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채워진 '율법의 독(The jar of law)'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채워야 할 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모습.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中

'사랑의 채무 의식'은 그들에게서 율법의 의는 완성됐고,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자축(自祝)의 선포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가치 역시 율법의 마침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롬 10:4)의 공로를 돋보여 냄에 있다. 그들의 믿음, 기도, 충성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는 가치가 없다.

그들의 순종과 섬김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올려지는 매개일 뿐이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고 한 것은, 그들의 모든 선행의 목적이 율법의 완성자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데 있음을 말한 것이다.

◈'율법 채무'의 화폐와 '사랑 채무'의 화폐

'율법의 채무'를 변제하는 데는 '죄인의 공덕' 화폐는 전혀 무용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화폐, '속전(a ransom, 딤전 2:6)'만이 유효할 뿐이다. '율법의 채무'에 '죄인의 공덕' 화폐를 내미는 것은 부도난 수표를 들이대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해, '사랑의 채무'화폐는 그리스도의 속전으로 '율법의 채무'에 벗어난 그리스도인이 통용하는 화폐이다. 그들이 지불하는 화폐는 적은 액수라도 하나의 손실 없이 차곡차곡 잉여금(剩餘金)이 된다.

0은 그 뒤에 따라붙는 모든 수를 곱해도 0을 만들어 버리듯, '율법의 채무'를 변제하고자 죄인이 아무리 많은 '공덕(功德)'을 들여도 모두 0을 만들어 버린다. 반면에 믿음으로 드려진 '사랑의 채무'화폐는 하나의 손실도 없이 모두 잉여금이 된다.

예수님이 두 렙돈(two mites)을 드린 과부의 연보(捐補)에 대해 그녀의 전 재산을 드린 것이고, 부자의 많은 연보보다 더 많이 드렸다 고 한 것은(눅 21:1-4) 다만 부자와 빈자의 형편에 의거해, 연보를 상대 평가한 결과가 아니다.

거기엔 영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곧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의 공로위에 드려진 과부의 연보는 손실 없이 오롯이 하나님께 올려진 반면,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드려지지 않은 부자의 많은 연보는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온전한 연보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율법의 채무자'가 되느냐 '사랑의 채무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전을 취하느냐 아니냐에 따른 결과임을 말하고자 한다.

자신의 공덕으로 '율법의 채무'를 변제하려는 자는 자신을 영원히 '율법의 채무자'로 남게 할 뿐이고, 그리스도의 속전(a ransom)으로 '율법의 채무'를 변제한 자는 은혜에 감읍한 '사랑의 채무자'로 남게 한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율법의 채무를 변제시켜주려고 그리스도를 '율법의 변제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거부하고 스스로 '율법의 채무자'로 남으려 했다(롬 3:19).

인간적 측면에서 이들의 성향을 보면, 대개 자기의 땀의 결실만을 취하려 하며, 공짜나 남의 동정을 받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처세성(處世性)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깔끔하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채무도 꼭 자기 손으로 직접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속전으로 취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자기의 구원을 그리스도께만 의존하는 것을 무임승차와 같은 불법으로 여기며, 최소한 자기의무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죄인이 값없이 주시는 그의 은혜를 수납하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엡 1:5-7).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그리고 그는 그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감읍하여 영원히 '사랑의 채무자'로 남기를 원하신다. 그 '사랑의 채무자' 의식이 그들을 겸비케 하고 그들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여, 그들을 안전지대에 머물게 할 것이다.

이 또한 그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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