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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성경관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3)

기독일보

입력 Nov 01, 2019 07:12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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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본지는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스위스 개혁교회 5백주년 기념논문 '츠빙글리의 성경관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을 매주 1차례 연재합니다.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2. 츠빙글리의 성경의 적용과 성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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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츠빙글리가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확고한 판단을 갖고서 철저하게 노력했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한다. 그가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했다는 것은 단순히 참된 지식의 근거만을 발견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성경은 지혜의 보고라거나, 구원의 복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사회의 건설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츠빙글리의 성경적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그 적용을 위해서 교회가 시정부당국과 일반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간여했다는 점이다. 츠빙글리의 선도적인 역할로 인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진영에 가담한 목회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고, 시대적 변화를 깨닫게 되었다. 스위스 지방의 정치적인 문제는 곧바로 교회의 독립권과 자치권을 확립하는데 깊이 연계되어져 있었다. 세속 정부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균형을 잃어버린 상태로 유지되어 왔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위상에 따라서 세속 통치자들의 맞대응이 혼란을 가져왔었다.

성경의 권위를 가장 신뢰하였다 하더라도, 많은 구절들에 대한 정확한 의미파악과 해석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츠빙글리의 성경해석과 개혁적인 신학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무엇보다도 16세기 신학의 핵심쟁점이었던 성만찬 해석에서 츠빙글리의 상징설은 가장 두드러진 가르침으로 남았다. 1525년 이후로 츠빙글리는 루터에게 몇 차례 의견을 표시하였고, 여러 편의 글과 저술을 발표하였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이라는 것은 자신을 주님의 군사로 다짐하는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고린도전서 10장 3절에 대한 해석에서도 츠빙글리는 단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면서 상징하는 것들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확신을 가졌는데, 말씀에 신실한 자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창조하고 보전하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교회의 기초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라고 확신했다. 각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우주적인 교회가 형성된다. 1530년에 저술했으나, 츠빙글리가 서거한 후 1536년에 출판된 『믿음의 해설』에 보면,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에게 보내는 헌정문이 담겨있는데, 여기에서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개신교회의 확립을 위해서 취리히 교회의 설교자로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지도력은 박해를 받았던 종교개혁자들의 상황타개를 위해서 여러 차례 모임에 나가서 중요한 발언과 저술을 발표하면서 발휘되었다. 1525년 이후로 루터의 성만찬 교리와 츠빙글리의 새로운 해석이 큰 차이를 보이면서, 신적인 임재에 관한 이해의 골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츠빙글리는 1529년에 마틴 부써의 주선으로 회집된 말부르크 개신교 지도자 모임에서 츠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을 이끌고 나가서 독일에서 온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서로 중요한 교리적 기초를 확립했다.  "말부르크 종교화의" (the Colloquy of Marburg)에서 츠빙글리는 루터파 지도자들과 함께 개신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세웠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막강한 권세를 가진 황제와의 사이에 정치적 긴장관계를 유발하였다. 1530년에 합스부르크 황제 챨스 5세가 개최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 (the Diet of Augsburg)는 유럽의 정치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던 독일지역 개신교의 문제를 주로 다뤘다. 황제는 독일 개신교회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요청했다. 멜랑히톤은 6월 25일, 루터파의 입장을 요약해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츠빙글리는 7월 11일에 자신의 개신교 입장을 담아서 『믿음의 이해』 (Fidei Ratio)를 제출했다.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부써와 볼프강 카피토가 쓴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던 황제는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고  1531년 4월 15일까지 모두 다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군주들은 스말칼트 동맹을 맺었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부써의 스트라스부르크도 이 동맹에 참여했으나, 츠빙글리와 스위스 개혁교회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부써가 너무나 루터파 신앙고백과 같은 입장이라고 불신하게 되었다.

스위스 지역 개혁자들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31년 10월 11일, 스위스 가톨릭 진영에 속한 군대가 두 번째 카펠전투에서 개신교 진영의 군대를 제압하였고, 츠빙글리는 사망했다. 그리고 11월 24일 외콜람파디우스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츠빙글리의 핵심적인 교리들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입장을 계승한 "제1 헬베틱 고백서"가 불링거에 의해서 정리되어서 1536년에 나왔고,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1549년의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서"로 연속되어졌다.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냐의 츠빙글리와 "임재"하는 것이냐의 루터의해석 차이는 끝내 간격을 좁히지 못하였다. 스위스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츠빙글리의 신학은 그 성경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루터와도 다르고, 부써와도 차이가 있다. 취리히 교회가 처한 개혁과제가 달랐기 때문이고, 반대파들과의 쟁점이 달랐다.

츠빙글리도 처음에는 루터와 거의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1523년과 1524년에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 다소 급진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아마도 그가 이러한 변화된 견해를 갖게 된 것은 네델란드 법학자이자 인문주의 해석자였던 코넬리우스 호엔(Cornelius Henrici Hoen)의 편지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되며, 같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이면서도 루터와는 달리 칼 쉬타트가 성만찬에서는 아무런 실제적 임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츠빙글리는 1524년 11월에, "성만찬에 관하여 매튜 알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츠빙글리가 출생한 생가 빌트하우스. ⓒ김재성 박사
 츠빙글리가 출생한 생가 빌트하우스. ⓒ김재성 박사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언급한 것인데, 영적인 양식임을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츠빙글리는 지적했다. "이것은 내 몸이다"(마 26:26)는 구절에 대해서 츠빙글리는 사람이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님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고 해석하였다. 상징하는 것을 가지고 그것의 본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츠빙글리의 해석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신학자는 네델란드 법학자 호엔과 바젤의 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였는데, 물질적인 음식을 나누면서 동시에 영적인 식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스부르그 개혁자 마틴 부써는 성만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며, 불신자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효력이 전혀 없다는 입장이었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성만찬에 관련된 주요 저작들과 그 안에 담긴 성경해석의 차이점들은 1527년 2월에 거의 동시적으로 출판되었다. 츠빙글리의 『친절한 주해, 즉 마틴 루터의 성만찬 해석에 대한 고찰』은 그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담겨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주장들을 요약해서 설명했고,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서 관련된 것들을 다시 제시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6장을 가장 중요한 해석적 기반으로 제시하면서, 그동안 설명해 온 입장을 요약하였다. 츠빙글리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몸을 실제로 가졌으며, 적나라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에, 유한한 신체로서 활동하다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 따라서 그의 몸과 피는 만물 가운데 편재할 수 없으며,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유아 세례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종교개혁자가 츠빙글리이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근거하여, 할례와 유아세례의 연관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는 이미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할례를 통해서 입증할 수 있었다 (롬 4:11-2). 그는 재세례파 후프마이어와 캬스파르 쉬벤크펠트의 저술을 비판하면서, 성도들이 구세주에 대하여 확고한 지식을 가진 후에 받는다는 믿음의 세례와 그 이전의 상태에서 받는 세례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가 어떤 연령에 속해 있다하더라도, 은혜의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다. 세례란 하나님께서 전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그의 자녀들과 언약을 맺는 "상징" (sign)이라고 츠빙글리는 확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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