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한반도 복음화를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

이번 주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평론에서는 12월 31일 개봉하는 영화 <미드웨이>를 분석합니다.

이 영화는 하와이 진주만에 이어 하와이 북서쪽 미드웨이까지 미국 본토 침략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을 격퇴하는 미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미군은 전력상 절대 열세에 있었지만, 암호 해독을 바탕으로 기적을 이뤄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잡게 됩니다.

Like Us on Facebook

영화 <미드웨이>는 <인디펜던스 데이> 시리즈 등 재난영화 전문 롤랜드 에머리히(Roland Emmerich) 감독을 필두로 에드 스크레인(딕 베스트), 패트릭 윌슨(레이튼), 루크 에반스(맥클러스키), 아론 에크하트(지미 둘리틀), 우디 해럴슨(니미츠 제독), 아사노 타다노부(야먀구치), 닉 조나스(브루노), 키언 존슨(제임스 머레이), 루크 클레인탱크, 맨디 무어, 대런 크리스 등의 초호화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편집자 주

태평양 전쟁과 미드웨이: 미드웨이 해전, 일본 연합함대의 수세전환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선은 크게 세 방면으로 나뉜다. 첫째는 영불해협을 경계선 삼아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독일에 맞서 싸운 유럽 서부전선, 둘째는 독일과 소련이 격돌한 유럽 동부전선, 그리고 셋째는 태평양의 섬들을 두고 일본과 미국이 맞붙은 태평양 전선이다.

세 방면의 주요 전선 모두 초반에는 침략을 강행했던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물론 이런 상황이 전개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막강한 전쟁물자 생산력과 병력 자원을 확보하고 있던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러나 초반 추축국의 우세는 1942년 6월을 기점으로 끝나게 된다. 우선 태평양 전선에서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을 기점으로 일본 해군의 공세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고, 8월부터는 유럽 동부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가 벌어지면서 독일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기 시작한다.

이후 수세로 돌아선 독일군은 1944년 6월 유럽 서부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거의 같은 시기 태평양 전선에서는 필리핀 해전으로 일본 해군이 붕괴되면서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게 된다.

당시 태평양 전선의 상황은 한국의 역사적 운명을 판가름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942년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선의 초반 전황, 즉 일본 해군 편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전황을 역전시킨 발판을 마련한 중요 사건이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미드웨이>는 바로 이 전투의 전황을 그려낸 작품이다.

1941년 12월 일본이 한창 침공 중이던 중국과 태평양 전체의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항공모함 전단을 동원한 연합함대로 하와이의 미 태평양 함대 기지를 기습했다.

당시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전력에서 상대적 열세에 처해 있었다. 미국은 일본과 전면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에 미리 충분한 해군 전력을 양성하지 못했고, 그나마 확보하고 있던 해군력 역시 일본과의 전투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미국 정부의 계산착오 덕에 일본 해군은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덕분에 양측의 해군 전력은 원래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이런 열세를 극복하고 첫 번째 대규모 해전의 승리를 일궈낸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전 일본과 연합군의 해군 전력 비교. 연합군이 항공모함 전력에서 큰 열세를 보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전 일본과 연합군의 해군 전력 비교. 연합군이 항공모함 전력에서 큰 열세를 보였다.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얻어낸 최대 성과는 일본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체 항공모함 전력의 절반 이상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항공모함 한 척(요크타운)을 잃었는데, 그것도 함재기와 운용인력 상당부분은 무사히 퇴함한 상태였다.

반면 미드웨이를 공략한 일본 연합함대에 속해 있던 항공모함 네 척(아카기, 히류, 소류, 카가) 모두는 함재기, 조종사, 정비인력과 함께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미 해군은 전술 목표인 적 항모전력 궤멸을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후퇴함으로써, 항모 전력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 해군은 태평양 전쟁 내내 항공모함 전력 측면에서 절대적 열세에 처한 가운데 힘겹게 전쟁을 이어나가야 했다.

비록 전함 및 순양함 전력은 대부분 보존하고 있었지만, 해전의 패러다임이 항모전으로 바뀐 이상 항공모함 및 함재기 전력 없이는 해상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와 미드웨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극심해진 일제의 한국 기독교 박해

미국의 미드웨이 해전 승리는 한반도 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수세로 돌아서면서 한반도를 비롯한 식민지에서의 자원과 인력 수탈이 크게 강화(1942년부터 강제공출제 시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전역의 정치적-문화적 내부 단속도 강화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조선총독부는 한국 기독교계에 신사참배, 예배 중 동방요배(東方遙拜)와 묵도, 일본군 국방헌금 등을 강요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이미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던 1930년대 후반부터 개시되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이들에 대한 박해는 일본의 전황이 악화되던 1942년 즈음을 전후해 격화되었다.

이 시기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서던 개신교 목회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투옥, 고문이 본격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부 개신교 목회자 및 지도자들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예배 중 동방요배, 즉 일왕이 거처하는 도쿄 궁성에 대한 목례와 일본군 전몰용사들에 대한 묵도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강화되었다. 1942년 열린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총회 차원에서 일본군에 전투기를 헌납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이 전투기 이름은 '조선 장로호'로 불렸는데, 대다수 일본군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 후반부에 격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의 한국 기독교 박해 시기 당시 조선장로회 총회가 일본군에 헌납한 해군 함재기 ‘조선 장로호’.
일제의 한국 기독교 박해 시기 당시 조선장로회 총회가 일본군에 헌납한 해군 함재기 ‘조선 장로호’.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의 수세 전환은 일제의 한국 기독교 박해가 끝나간다는 역사의 신호였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시험하는 극심한 고난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의 상황은 마치 로마 제국 최후의 기독교 박해 시기(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297-311년)를 보는 듯했다.

주후 3세기 말, 이민족 침입과 기독교 확산으로 흔들리던 제국을 다시 '로마화'하기로 결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디디모스 신전 신탁에 따라 기독교와 마니교 박해를 개시한다.

이 박해는 네로 황제 이후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 사건 가운데 규모로나 정도로나 가장 악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로마의 신들과 황제 숭배를 거부한 기독교 지도자 다수가 잔혹하게 살해되고, 교회 재산과 기독교인들의 모든 법적 권리가 박탈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로마 제국 내부의 분열과 불안을 가중시켰고, 더 이상 박해를 지속해봐야 제국의 붕괴만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에 의해 끝을 맞이하게 된다(313년 밀라노 칙령).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 전파의 사역, 선교 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나기 직전에 자주 대규모의 박해와 성도들의 순교가 발생하는 상황이 전개돼 왔다.

예를 들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복음이 확산되기 직전에는 유대인들에 의한 스데반의 순교, 헤롯왕에 의한 사도 야고보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 박해가 발생했고, 이들의 순교를 발판으로 로마 제국 전역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앞서 예를 든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와 로마 제국 내 기독교인들의 순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어졌다. 한국 기독교계 일부 지도자들의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는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빠른 회복과 급격한 교인 증가로 이어졌다.

이런 역사적 사례들은 선교와 복음화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역사의 섭리는 '모든 민족과 열방에' 복음이 전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그 과정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훼방하고 시험하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관여되는 듯하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는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자행하던 기독교 박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그 후 완전한 종전과 해방에 이르기까지 약 3년 동안 한국 기독교계는 여러 방면으로 순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세는 이 시기의 인내와 신앙의 투쟁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는 그 결실에 취한 나머지, 믿음의 선진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난의 과정을 망각한 채, 순전한 신앙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역사는 교회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화 <미드웨이>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큰 규모의 전쟁을 재현해 보여주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교회와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신앙의 싸움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계속>

미 해군 항모 엔터프라이즈 호 급강하 폭격기 대대의 공격을 받는 일본 항공모함 카가.
미 해군 항모 엔터프라이즈 호 급강하 폭격기 대대의 공격을 받는 일본 항공모함 카가.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