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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박사 "뉴욕은 광야와 같은 곳...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야"

기독일보 김대원 nydaily@gmail.com

입력 Jan 28, 2020 09:01 P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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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두번째 큰 어려움은 우상숭배의 유혹"

김재성 박사가 26일 뉴욕 임마누엘교회(담임 정피터 목사·WOA)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뉴욕은 광야와 같은 곳"이라면서 뉴욕 생활 중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성경구절을 나눴다.

김재성 박사가 26일 뉴욕 임마누엘교회(담임 정피터 목사·WOA)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뉴욕은 광야와 같은 곳"이라면서 뉴욕 생활 중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성경구절을 나눴다. (포토 : 기독일보)

설교하는 김재성 박사

설교하는 김재성 박사 (포토 : 기독일보)

뉴욕을 찾은 국제신학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박사가 뉴욕의 삶 가운데 반드시 붙들고 살아야할 성경 구절을 나눴다.

김재성 박사는 26일 임마누엘교회(담임 정피터 목사·WOA)에서 '행7:38-43'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통해 "뉴욕에서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광야의 생활과 닮았다"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느꼈을 가장 큰 어려움은 배고픔이나 더위 혹은 추위가 아니라 바로 두려움이었고, 이는 빌4:6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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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김재성 박사는 미주의 이민목회지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곳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필라델피아연합장로교회 담임을 역임한 바 있다. 이날 김재성 박사는 자신이 오랜 기간 신학자로 또 이민교회 목회자로 사역하며 겪었던 다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을 대표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나누고자 했다.

김재성 박사는 "지난 65년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참 많은 경험을 했고 그 중에는 좋은 일들도 많지만 나쁜 일들도 많았다"면서 "내가 어떤 상황, 혹은 어떤 위치, 또 어떤 지위에 있든지 삶은 마치 광야에 있는 것과 같다. 특히 뉴욕이라는 거친 광야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성경구절을 나눠주고 싶다"면서 설교를 시작했다.

김재성 박사는 이날 본문이었던 스데반의 설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의 법과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였고 이를 유대인들이 듣기 싫어 했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 또한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고 듣기 괴로워했다"면서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한 것은 유대인들이 모세 때의 이야기를 매우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광야에서의 일을 통해 오늘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김재성 박사는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뜨거운 낮에는 그늘이 없고 또 밤에는 아주 춥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이 얘기하기를 가장 큰 어려움은 음식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목마른 것도 절대적인 어려움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김재성 박사는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은 하나님이 구름기둥을 보내어 가리셨다. 또 밤에는 불기둥을 보내셨기 때문에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21세기 현재 뉴욕에 사는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건강, 비지니스, 사람과의 관계 혹은 정치적 문제 등등은 광야의 백성들이 겪은 것과 같은 불안감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성 박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결국 우상을 만들었던 부분과 관련,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기에 우상을 만든 것"이라면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겠고, 당장 어떤 적이 나타나서 그들을 공격할지 걱정과 불안이 매번 엄습해 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상숭배에 대해서도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상숭배의 유혹이 따라왔을 것"이라면서 "이러한 유혹은 현세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에 김재성 박사는 두려움을 극복할 성경구절로 빌립보서 4:6을 강조했다. 김재성 목사는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말고 대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재성 박사는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을 배반하고 항상 모세를 향해 항상 불평불만했다는 사실"이라면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추방됐다. 우리의 마음은 아담 때부터 원죄로 오염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이성 너머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성 박사는 "유명한 철학가 임마누엘 칸트는 종교는 이성이라는 한계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자신의 이성의 한계 안에 있다'고 그에게 말하고 싶다"면서 "이성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이성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김재성 박사는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40일 금식 후 사단의 광야에서의 시험으로 부터 승리하셨고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다"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성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자.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했기 때문의 그의 승리가 바로 우리의 승리"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재성 박사의 설교전문이다.

광야 교회(행7:38-43) 김재성 박사

성경적 교회의 개념 중에 하나가 광야교회라는 표현이다. 신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현대 교회에서도 이 표현을 통해서 배우고 얻어야할 교훈들이 많다.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설교를 하면서 모세시대의 성도들이 참된 예배에 힘쓰던 공동체였으므로 “광야교회” (the assembly in the desert)라고 언급했다 (행 7:38).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광야 가운데 있는 모임 (교회)”, “사막 한 가운데 있는 회중들”이라는 뜻이다.

1. 족장들의 광야생활

광야 교회의 첫 출발점은 모세이지만, 그 뿌리에 아브라함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많은 이교도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광야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모든 족장들이 걸어간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의 여정이었다. 족장들은 저마다 해결해야 할 자신의 문제점을 안고 살아야 했다. 무작정 광야를 떠돌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서 야곱이 이집트에 들어가기까지 2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집트에서는 요셉 이후로 모세에 이르는 사백 삼십년이 소요되었다 (출12:40,41). 족장들의 시대가 계승되어 내려가는 동안에,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시의적절한 은혜를 주셨다.

고향 친척을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했는데도, 아브라함은 친 자식을 무려 이십 오년이나 기다리면서 인내해야만 했다. 개인적인 수단방법을 다 부렸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한 방식을 알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모델로서, 메시야를 대망하는 성도의 모범으로 삼으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개인도, 교회도, 구원의 역사도, 한번 헌신하였다하더라도 당장 즉석에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면서 체득해야만 은혜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축복을 가로챈 야곱의 일생은 집을 떠나서 살아가야만 할만큼 처절했고, 험난했다. 그가 얍복강에서 씨름하면서 체득한 은혜는 남은 생애를 절뚝발이로 살아가면서 기억하도록 하셨다. 남은 생애를 장애인으로 감내해야 할 만큼 야곱은 버려야할 야심과 욕심이 컸던 사람이었다. 창세기 33장 28절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로 이름을 바꿔주셨고, 마침내 복수의 칼끝을 피해서 안식을 얻도록 해 주셨다.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던 그의 가정에 해가 돋았고, 서광이 비췄다 (창 32:31).

이처럼 모든 족장들의 광야생활이 하나같이 의미없이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모세와 함께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순례자의 여정은 힘든 여건 속에서 훈련의 과정이었다. 말씀 앞에서 함께 순종하도록 하시고자, 신앙인격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성숙기였고,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노예로 살던 이집트를 탈출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이자 구원이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도 아래서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을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단순한 과정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광야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광야사건은 가슴에 소망을 가진 성도가 구체적인 구원의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비전 연수의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건이다.

무너져가는 한국 교회를 다시 세우고, 전 세계교회에 모델이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광야에서 어려운 여행을 지속하지만, 그들은 먼저 여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전제적인 조건, 혹은 기본적인 은혜의상황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초라하고 형편이 없으나, 교회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창대함에 이르는 과정을 걷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서 쓸모있는 그릇이 되게 하고자, 광야에 이르게 되었고, 순종과 절제를 몸으로 체득 하여야먄 했던 것이다.

모세를 따르던 무리들 중에 대부분은 광야생활에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불평하다가 죽어갔다.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광야에서 성장했고, 태어나서 자라났는데,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를 거쳐서 시험을 이겨내셨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다. 교회도 역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광야시기를 거친 후에, 종말의 날이 오게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다.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벌어진 나쁜 사건들이 많았고, 훗날까지도 교훈을 준다(고전 10:5-10). 교회는 새로운 광야 백성들이다. 교회가 처한 상황은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모두 다 홍해를 건너서 바다 가운데로 통과한 것은 물세례이다.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으니,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았다. 우상숭배자들과 음행하는 자들, 불평하는 자들과 시험하는 자들, 원망하는 자들과 교만한 자들, 모두 다 멸망하였다. 광야에서 살았다하여 제멋대로 방종할 수 없었다. 엄격한 법률을 준수해야만 했고, 결국 참된 예배자의 삶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광야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역시 히브리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하게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다. 성경에서 “광야”라는 곳은 교회의 정체성과 상황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단어이다. 이스라엘 땅에는 황무지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광야가 많다. 예루살렘을 나서면 곧바로 황량한 모래와 자갈, 메마른 강줄기로 뒤섞여 있는 유대광야가 나온다. 광야의 생활은 시험과 미혹들로 둘러 쌓여있다. 대체로 광야로 나간 시절은 고난과 연단을 받은 기간이었고, 훗날에는 영광을 얻어서 보상을 받았다.

광야는 오직 이스라엘 외곽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교회도 역시 21세기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광야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뉴욕 한 복판에서도 역시 광야의 생활과 같은 고통과 아픔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리 현대 기계문명과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역시 세속 문화와 치열한 약육강식의 소용돌이 속에는 비인간적인 죄악이 진동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주식시장과 고가 보석 등 돈에 관련된 거래가 가장 많이 시행되는 뉴욕에서 삭막한 광야와 같은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뉴욕에는 마약과 죄악에 오염된 성도들을 돕는 “리디머 교회”(Redeemer Church)에서 많은 것들을 교훈 받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풍요하면서도 첨예한 경쟁의 한복판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광야생활을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교회는 광야의 가치관들을 갖고서 세속도시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물질적인 풍요가 결코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 역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심한 후에, 아라비아로 갔다. 얼른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른 사도들을 만나서 자신의 변화를 인정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아라비아”로 갔었다고 고백했다 (갈 1:17). 추정컨대, 그곳에서 무명의 사도 바울은 새로운 신앙을 정립하면서 유대교와 율법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였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내려간 “아라비아”는 “나바티아 왕국” (Nabatean Kingdom)에 속해 있던 곳으로 사해 호수 남동쪽에 자리했던 소규모 부족들이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추리영화의 촬영지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페트라는 기묘한 바위들과 동굴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아라비아 반도 북쪽을 진출한 일부 아랍족속들은 주전 4세기부터 사해 호수 남쪽 지역에 정착하여 작은 왕국을 형성했는데, 이 지역을 연구한 고고학의 발굴로 의문이 풀렸다. 이 지역은 A.D 106년 로마제국의 한 주로 병합되면서 차츰 동화되고 말았다. 바울 사도가 그 지역에 머물던 시기에는 아레타스 4세의 통치하에 있었다.

광야라는 곳은 단순히 방황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장소로만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 곳이다. 모세 시대 성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구속사적인 체험을 하면서도, 그들 자신들의 신앙과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광야생활이 필요했었다.

이러한 광야의 시련이 21세기를 맞이한 전세계 교회와 특히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이라고 본다. 오늘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당해야할 선교적 사명과 자기 훈련을 위해서 히브리서는 많은 권면을 제공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거짓 성공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떤 목회자에 대해서 매우 성공했다는 식으로 자랑해서는 안된다. 큰 교회에 다녀야만 이익이 크다고 말한다거나, 대형교회는 마치 일류교회라고 한다거나, 유명한 목사 혹은 설교 잘하는 목사 등을 내세워서 성도들을 미혹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세속주의와 타협한 상술에 불과한 것들이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다 교회를 위치시켜서, 우리 자신들이 제 분수를 지키도록 가르쳐준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2. 출애굽과 광야의 교훈들

모세와 함께 성인 남자만 60만 명이 움직였고, 어린 아이까지 합하면 아마도 삼 백 만 명이 함께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광야시대는 임시적이며, 예비적인 훈련과정이었다. 모세 시대의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향한 꿈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터전으로 삼게 된 가나안 땅은 여리고 성을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주변으로는 요단강물이 흘러내려가고 성 안에는 엄청나게 큰 샘물에서 막대한 생수가 솟구치는 곳이다. 여리고 성은 풍부한 물이 있기에 농경지와 거대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성경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을 벗어나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황량한 벌판과 사해 호수가 있다. 서쪽으로는 유대 광야가 펼쳐 있는데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조건이라서 흙먼지만 날아다닌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 다니면서 굴에 숨어 지내던 엔게디 지방은 사해 호수 서쪽으로 널리 퍼져있다. 사울의 군대 삼 천 명이 동원되었지만 다윗을 찾지 못했으리만치 불규칙적으로 솟구친 바위와 잡목들과 구릉들이 엉크러져 있다. 엔게디는 울퉁불퉁한 언덕들과 바위들이 시야를 가로막는 척박한 곳이다 (삼상 24:1-4). 만일 그 가운데서 살아가야 한다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지 못하기에 불편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광야에 함께 모여 살아가던 백성들은 언약 공동체의 형성과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들에게는 생활과 신앙의 기준이 되는 율법이 주어졌고, 예배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도록 되어졌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또 다른 중보자를 기대하고 살았었다 (신 18장).

광야 생활은 위험과 구출의 연속이었다. 강력한 바람, 타는 목마름, 뜨거운 태양, 추운 밤 등등 척박한 자연과 싸워서 이겨내야만 한다. 자연은 아름다움을 동반하지만, 이처럼 고통을 가져다 주는 이중적인 모습이다. 일상 생활을 위해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편안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 광야다. 각종 위험과 어려움에 둘러 쌓여 있다. 날마다 수많은 군중을 먹일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의 식량이란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러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신뢰하고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아서 구출되던지, 아니면 다른 것을 추구하다가 망하던지 둘 중에 하나였다. 다수의 군중들 중에는 지도자에게 반역하는 자들, 선동가들, 불신앙의 무리가 뒤섞여 있었다. 믿음을 따라서 순종하며 나가자는 사람들도 있지만, 배신자들과 위선자들도 많았다.

광야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두려움" (fear, afraid)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주변 부족들에 대한 두려움, 닥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무섭고도 절망적이었다. 모든 사람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왜 그러한 시기를 거치게 하였을까? 광야의 두려움을 이기도록 섭리하신 내용은 신명기 8장 1-3절에 담겨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선포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를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생활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순종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비결은 언약을 신뢰하는 길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예수님께서 광야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이러한 구약시대의 상황이 동일하게 작동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기도 가운데서 바로 이러한 고난의 생활을 체험하셨고, 사탄의 미혹을 이기셨다. 머리되신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순종을 완성하심으로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문자 그대로 예비하셨다.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실패하였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완전하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였다.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어려운 조건으로 압박을 해 오는 광야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안내표지판과 잘 포장된 고속도로가 없던 시대에 광야는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구약성경에서 광야에 대한 교훈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장소를 사용해서 오직 말씀에만 의존하는 자들로 가르치고 연단시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해 살면서도 장차 새로운 시온성에 들어가야 할 하늘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소망은 장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였다. 현실과는 전혀 다른 미래의 광야생활을 예상하고 기대하였다. 이사야서 40장 3-5절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그 후에 오시는 메시야의 출현이 그대로 담겨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 하셨느니라.

드디어 신약성경에서 광야에 대한 성취가 드러났다. 구약성경에서의 광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기대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았던 곳이다. 광야시대를 이끌었던 모세와 장차오실 메시야는 동일한 성격을 가진 지도자이다.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광야의 소리는 세례 요한이었고, 그가 나타나면서 장차 메시야가 오실 것을 증언하였다(막 1:-8).

3.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광야

광야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곳이다. 광야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산들, 짐승들, 천사들의 위로 등이 함께 뒤섞여 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활동에 대조되어지는 더 위대한 분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것처럼, 세례 요한이 등장한 것이다. 마가복음 1장 2-3절은 그야말로 우렁차게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불의와 죄악에서 벗어나라는 치열한 회개의 요청이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세례 요한에 이어서, 등장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이끌려서 광야에 나갔다 (마 4-11, 눅 4:1-13). 광야에 머물러 지내면서 혹독한 시험을 견뎌내야만 했다. 사탄의 미혹을 이겨낸 예수님의 답변들은 모두 다 신명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구약성경 신명기는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지내던 유대인들이 시험을 받았을 때에 만들어진 하나님의 계명이다. 예수님의 시험은 새로운 광야시대를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벌어진 매우 중요한 사건들은 우연히 발생하거나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에서 의미심장한 행동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글과 광야에서의 사건들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세의 글이 자신을 증거한다는 관련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 5:46-4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속역사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호 중첩되어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과 예수님. 예수님은 헤롯이 죽이려 하자, 이집트로 잠시 피난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다시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려면 모세가 통과한 광야와 사막을 지나가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이 사건은 구약시대에 이미 모세를 통해서 드러낸 구원사건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집트로부터 나오셨음을 기록한 마태복음 2장 15절은 호세아서 11장 1절을 인용한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흉년과 기근이 엄습하자, 이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갔다. 사백 삼십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다.

둘, 열두 지파와 제자들을 부르심을 평행구조로 생각해 보면, 전 인류를 포함하려는 계획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따로 불러 세웠다. 그런데 열 두 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우연히 지나칠 일이 아니다. 야곱은 아들 12명을 낳았고, 그 아들들은 각각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이 되었으며, 각 부족들의 시조가 되었다. 열 두 부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씨족 공동체에서 분배된 땅과 권한을 결정하는 근간이었다.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열 두 사도가 세운 터전을 근거로 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셋,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는 모세의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고 그 의미의 성취를 선포하시며, 완성된 교훈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근처의 산에 올라가서 여러 차례 평이한 설교를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자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되어서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요 6:45-47).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율례를 가르쳤고, 열 두 부족은 선조들이 남긴 이야기와 모세의 가르침을 전해 들으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배웠다. 모세의 율법을 다시 압축하여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황금률을 가르쳤다.

넷,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심을 생각해 보면, 모세 시대의 기적과 연관되어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설교와 기적적인 병고침을 목격하기 위해서 따라온 수많은 군중들이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은 보시고, 어린 아이가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굶주림을 해소시켰다 (요 6:1-15, 6:41, 48-51). 이 사건은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아침마다 만나를 먹여주셨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다섯, 변화산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오직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벧후 1:16-21). 광야의 길에서 잠시 멈춘 후,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은 후에 얼굴에서 광채가 나왔다.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제발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달라고 간청했다.

여섯, 생수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 (요 7:38). 모세와 함께 유대인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에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물이었다. 모세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생명을 유지하게 하였다(민 20:1-13).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선포했다. 영혼에 제공되는 예수님의 생수가 없으면, 믿음의 길에서 메말라 죽게 된다(고전 10:4).

일곱,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을 물리치셨다. 예수님은 사십 일 금식 후에 찾아온 사탄의 미혹을 신명기서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사십 일 동안 보냈다(출 24:18). 그 기간에 이스라엘 군중들 속에서는 반역과 배신이 일어났다. 이미 에덴동산에서도 간교한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했다. 사탄의 모략은 광야에서도 지속되었고,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했다.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지쳐가던 자들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다가 불뱀에 물려서 죽었다. 그러나 놋 뱀을 바라본 자들은 모두 다 살아났다 (민 21:9).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굶주렸지만, 마침내 사탄을 제압하고 승리하셨다. 간사한 마귀를 제압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지켜주신다.

광야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주님과 연합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의 승리가 곧 성도의 승리이며, 교회의 승리가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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