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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통신 산업의 원조, 사무엘 모르스의 신앙

기독일보 @chdaily.com

입력 Feb 13, 2013 08:05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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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장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장차 근무하기를 가장 선호하는 직장은 과연 어디일까? 수 년 전 한 통계 조사에서, 놀랍게도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재벌이 아닌 통신관련 공기업을 꼽아서 커다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은 민영화된 이 기업이 당시 정부 투자 기관이라는 안정성에도 매력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은 정보 통신 분야가 앞으로 미래를 이끌어갈 대표적인 업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오늘날 정보 통신 분야는 빠르게 세상을 변혁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모르스는 바로 지금부터 꼭 150년 전에 전신기를 발명하여 디지털과 정보 통신 산업의 시발을 알린 사람이었다.
사무엘의 어린 시절

사무엘 모르스(Samuel F. B. Morse:1791-1872)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찰스타운이라는 곳에서 유복한 기독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그의 아버지 제디디아 모르스(Jedidiah Morse:1761-1826)는 유명한 성직자이면서 지리학 책을 내기도 한 학자였다. 그가 쓴 지리학 서적은 미국의 최초 지리학 교과서로서 25판이나 인쇄할 정도로 권위와 인기를 끈 책이었다. 흥미 있는 것은, 이 지리학 교과서가 노아의 홍수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으며 성경적 연대기를 그대로 지구 역사에 도입하고 있는 점이다. 그 외에도 노아의 방주 안에 과연 어떻게 모든 동물을 실을 수 있었는지를 학문적으로 논하는 등 성경적 관점으로 일관한 책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통해 독립 초기부터 미국은 청교도 정신에 따라 모든 교육을 성경적 관점에서 행하고 있었으며, 자연과학의 해석도 진화론적 관점이 아닌 성경적·창조론적 관점을 일관되게 다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미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이 마음대로 교육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된 것은 1925년 스콥스 재판 이후였다. 오늘날 우리 중고등학교 검정교과서에 진화론을 비판하는 내용을 조금도 싣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부친의 신앙을 이어받은, 사무엘을 포함한 세 아들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철저한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 대학인 예일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무엘이 한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커다란 업적과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사무엘 모르스가 자신이 발명한 전신기로 최초로 송신한 내용이 성경구절이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훗날 전신기를 개발하기까지 고난과 경제적 어려움과 주위의 냉대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으며, 선교사업과 성직자 양성기관을 후원하던, 평생을 한결같이 하나님께 충성한 열심있는 신앙인이었다.

미술에 뛰어난 아이

사무엘은 어린 시절, 미술에 대단한 관심과 재능을 보인다. 아마 전신기의 개발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모르스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는 화가와 조각가로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사무엘의 이런 예술적 취향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어 마침내 그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사무엘의 나이 20세 되던 1811년의 일이었다. 모르스의 예술적 재능은 바로 이 영국 유학에서 꽃피우기 시작하였으며 사람들에게 명성도 얻게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이름난 조각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한 것도 이 때였다.

그가 제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초상화와, 프랑스 태생으로 미국남북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라파엣 장군의 초상을 그린 것이나, 25세 되던 1815년에 국립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역임한 것만 보아도 그의 예술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예술적 재능이 고도의 과학적 재능으로 옮아 위대한 발명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예술적 재능을 가졌던 그가 무슨 이유로 조금은 엉뚱하게 느껴질 만큼 전혀 생소한 전신기의 개발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전해지는 일화

1832년 12월, 모르스는 유럽으로부터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으로 가는 눌리호라는 배를 타게 되었다. 눌리호는 사람과 우편물을 함께 태우고 다니는 여객선이었다. 여기서 모르스는 찰스 잭슨이라는 미국인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희귀했던 전기에 대한 실험을 프랑스에서 구경하고는 그 자랑을 함께 배를 탄 사람들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잭슨은 프랑스에서 전자석도 하나 선물로 받아가지고 와서 배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전류가 통하면 쇠붙이가 자석으로 변하게 되는 전자석은 영국의 윌리엄 스타전이라는 사람이 7년 전에 발명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여객들 틈에서 전자석과 전기 실험에 관한 잭슨의 이야기를 말 없이 경청하던 예술가 모르스에게는 어떤 청사진이 하나 떠오르기 시작한다.

‘전기의 흐름과 전자석을 이용해서 먼 곳으로 신호를 보내는 통신 수단에 이용할 수는 없을까?’.

화가인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설계도가 마련되고 있었고 그것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선장님, 이제 얼마 후에는 세계가 깜짝 놀랄 전신기의 개발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발명품이 바로 이 눌리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선장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일화는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그의 전신기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주일학교 원조의 한 사람

그러나 그가 전신기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가 고향 교회에서 시작한 주일학교는 미국 최초의 주일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종교가 없는 교육이란 기독교의 건전한 규범을 무모한 이론으로 바꾸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시 전신기 개발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살펴보자.

전신기 개발의 직접적 계기

전신기 개발을 본격화하기 훨씬 이전, 모르스는 또 다른 전신기의 발명에 대한 소명과 동기가 있었던 것 같다. 미술을 공부하러 그가 영국이 런던에 도착하던 1811년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미국 선박들이 적성국인 프랑스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미국 선박들을 선제 공격하였다. 그리고는 영국은 미국과 화해를 모색하게 되는데, 대서양을 건너 수 개월 후에 이 메시지가 미국에 전달되었을 때에는 이미 미국은 영국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한 이후였다. 결국 이 분쟁은 2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지만, 평화 협정이 서명된 이후에도 양국의 일부 군함들은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정보를 듣지 못한 채 싸움을 계속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신속한 통신의 부재가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1825년에는 개인적인 불행도 맞게 된다. 미국 코네티컷 주의 뉴헤븐이라는 곳에 있던 그의 아내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아내가 있던 곳으로부터 500km나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장례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편지가 1주일이나 지난 후에야 그에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통신이 발달되었다면 모두 발생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이런 거듭된 일들이 그에게 전신기를 개발하는 데 촉매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손재주 좋은 다재다능한 발명가 모르스

발명가로서 모르스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동생 시드니와 함께 개발한 물 펌프와 대리석 절단 기계도 있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진 기술을 배워 미국에 전한 미국 최초의 사진사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인물 사진을 찍으려면 10분 이상을 꼼짝없이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인물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르스는 뉴욕대학의 동료 교수 존 드래퍼와 공동 연구하여 노출 시간을 1분으로 단축하였으며, 은판 사진 기구를 개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모르스는 당시 학생들에게는 별난 것에 관심이 많은 괴짜 미술교수였다.

아무튼 1982년, 전자 통신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모르스는 뉴욕대학의 미술과 조각 교수로 있으면서 5년 동안 같은대학 화학 교수로 있던 레오날드 게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에게 하나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실험에 따르는 재정문제였다. 그는 돈 많은 사람들과 미국 정부에 이 일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이 일에 재정적으로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영국 등 유럽을 오고 가면서 동분서주하였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재정적 어려움과 더불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완전한 무일푼이 되어 끼니를 걱정할 만큼 방황을 거듭하게 되었다.

고난을 통한 신앙의 성숙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러하듯, 그도 환난을 통하여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연단을 거쳐 성숙된 신앙인이 되어 갔는지도 모른다. 이런 고통스런 기간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난 적이 없었다. 마치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하지만 모세는 묵묵히 때로는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였듯이 모르스는 인내하며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게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섭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1843년,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모르스는 전신기에 관한 정부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가 개발한 전신기를 사용하게 된다. 최초의 전선은 수도 워싱턴으로부터 약 64km 떨어진 볼티모어까지 연결되었다.

1844년 5월 24일 금요일, 마침내 역사적인 날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기하고 놀라운 발명품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모르스는 조금은 긴장되면서도 감격된 표정이었지만 먼저 전신기 앞에 앉아 조용히 묵상 기도를 드렸다. 최초로 전송되는 공식 문장은 그의 오랜 친구의 어린 딸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모르스 아저씨를 통하여 사무엘 모르스의 일생을 지탱하고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분이 과연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의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민수기 23장 23후반절의 이 말씀은 이렇게 최초로 전신기를 통하여 모르스의 부호로 볼티모어에 전해졌다. 모르스 부호는 점과 선으로 알파벳을 표현한, 아주 과학적인 기호였다. 전신기는 이 부호들을 종이에 써내려 갔던 것이다. 이 내용을 수신한 볼티모어에서는 다시 똑같은 내용을 워싱턴으로 보냄으로써 통신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이 커다란 사건은 단번에 모르스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전신기가 산업화됨에 따라 엄청난 물질적인 부(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시기하는 일부 사람들은 발명가로서의 그에게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소송을 걸기도 하였지만, 미국 대법원은 모르스야말로 1837년 이래 완벽한 전신기를 개발한 유일한 발명가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자만하거나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이 모든 시도를 통하여 지금의 나를 이 위치에 이르게 하셨을 뿐이다. 영광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님일 뿐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동생에게 고백하고 있다. 만일 그가 최초로 송신한 말이 “미국 국민 만세!”라는 식의 지극히 평범한 감격의 표현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평범한 과학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면 이렇게 사소한 결정이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는 경우를 우리는 상당히 많이 목격하게 된다. 지극히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신 우리 하나님이 아니신가(눅 16:10; 마 25:40). 사무엘 모르스가 전신기를 통해 최초로 송신한 말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었다는 것은 미래 정보 통신 시대와 더불어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이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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