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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너서클 아닌... 하나님 사랑 실천 공동체여야

기독일보

입력 Jan 16, 2017 04:50 P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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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울보목사

호용한 | 넥서스CROSS | 256쪽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모든 스토리들은 소중하다. 하지만 그 인생의 스토리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인생을 일관성 있게 살려면,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속적 성장 없이는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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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유혹들과 문제들, 그리고 비난들 앞에서 자신을 지키고 절제하며, 극복하는 것을 넘어 포용하는 자리에까지 가야 한다. 즉 자신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자들까지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그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을 향해 비난하는 그들을 다시 비난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수용할 수 없다면, 결국 때려치우게 된다.

상처 주는 사회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의심받고,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소위 '언론플레이'를 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거나,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추구하려는 자들을 종종 목격했다.

그래서인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즉, 좋은 일을 통해서도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 악의적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섣부른 판단으로 또 다른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사람이 또 다시 상처를 주는 악순환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

가장 큰 죄

모든 죄는 나쁜 것이기에 죄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이 어쩌면 옳지 않은 태도일 수 있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부득불 죄의 경중을 나눌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필자는 극심한 가난과 끝없는 탐욕이라고 생각한다(신학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말하지 않기 바란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가난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 가난은 범죄의 유혹을 불러온다. 오늘날 이 시대에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난은 죄다. 가난한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가난한 자들이 속출하고,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가난의 대칭점에 또 하나의 죄가 있다. 바로 '멈추지 않는 탐욕'이다. 탐욕이라 하여 상위 10%의 부자들만 떠올리지 말라. 그들만 탐욕적인 것이 아니다. 탐욕은 물질의 많고 적음보다, 자신의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물질을 획득하는 것,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탐욕이다. 부정적 방법으로 물질을 획득할 때 가난한 사람이 발생할 수 있다.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사용함으로 가난이 대물림된다. 이러한 탐욕이 자행되고, 묵인되는 사회는 죄이다.   

분배가 아닌 나눔

저자는 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웃의 궁핍과 아픔, 곤고함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별 상관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부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며, 부자가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옥수동의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필요를 아껴 다른 이들을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국가의 손이 일일이 미치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를 옥수동교회가 살피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도움을 받아 분배하는 복지관이 아니라 자발적인 나눔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교회로 자리잡고 있다.

어제 필자는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저렇게 비싼 땅에 저렇게 크게 지어서 뭘 하려고 하는지, 어려운 사람들 돈 받아서 자기들 집이나 짓고..., 저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 돕지는 않고...." 차마 택시 기사에게 목사라고 밝히지도 못하고,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오늘날 교회 또한 자신들만을 위한 탐욕에 물들어 있지 않은지 성찰이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하다. 지금의 사회는 부자보다 교회를 훨씬 더 싫어하며, 교회 다니는 부자는 혐오의 대상이다. 이것을 단순히 '안티'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즉 성경적 교회는 자기를 희생하여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이다. 나눔과 자기희생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땅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코뮤니타스

'사회는 하나의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한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평안한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리미날리티 단계'라 칭하고, 이러한 순간에 머물러 있는 모임 혹은 공간 등을 '코뮤니타스'라고 불렀다. 코뮤니타스 상태는 정형화되고 구조화된 체제와 대립된 상태로 정의된다. 이러한 사회 상태란 의례 수행과 신분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참여 방식으로, 자유, 평등, 동질성, 동료애 등이 나타난다.

코뮤니타스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 핵심이다. 사회가 조직화되고 구조화되면서,상위그룹과 하위그룹 같은 것들이 형성되고, 각각 계층들도 발생하면서 서로 분리되고 단절된다.

이러한 문제는 소규모 원시부족에서도 나타난다. 빅터 터너는 잠비아의 은뎀 부족을 연구하면서 이들이 이러한 구조와 계층의 단절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면서 불균형과 서로간의 단절을 회복하고 다시 서로가 남남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행위들을 '코뮤니타스'라고 불렀다. 물론 코뮤니타스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지만, 그 핵심은 공동체 형성에 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는 시시때때로 기독교와 타종교를 분리시키고,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등의 구조로 단절시키는 오류들을 범해 왔다. 남북 아메리카의 인종청소, 중세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 등 모두가 기독교의 기득권만 강조하고 세상을 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간과하는 잔재들이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다. 이 화목은 먼저 믿은 우리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아직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특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화목의 사역을 위해 먼저 부름받은 자들이다. 그 화목은 종교적 화목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은 유대교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치유와 회복)가 임하였음을 느끼게 해 주시는 것이었다.  

교회는 믿는 자들만의 이너서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즉 우리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의 빈부, 신분, 제도와 구조, 계층을 초월해 우리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임을 체험하는 그 순간에 머물고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옥수동교회를 통해 신분, 나이, 학력, 성별, 재산 등을 초월해 이웃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는 공동체의 훌륭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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